짐스러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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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el – Elsje, Holland // 필자 소유의 The Complete book of Erotic Art 책에서 발췌
 
세 남자가 똑같이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한결같이 기괴하리 만치 과장된 자기 좆을 힘겨워한다. 얼굴은 심각하고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이다. 유인원 같기도 하고 우주인 같기도 하다. 머리털은 하나도 없다. 그림으로만 보아도 비쩍 말랐다. 세 사람이 좆을 다루는 모습이 다 다르다.

맨 앞의 남자는 그중 그래도 덜 말랐다. 좆도 가장 빳빳하다. 마치 그 좆이 무슨 전가의 보도인 양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가장 씩씩하게 걷고 있다. 좆 생김새도 아직은 근사하다. 늠름한 귀두부분이며 탱탱함이며 휘어진 각도이며 일등품이다. 그러나 휘청거리는 하체에 비한다면, 그리고 그 크기에 비한다면 분명 짐스러운 좆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남자의 경우는 좀 슬퍼진다. 젓가락처럼 가늘기만 하고 긴 좆이 이미 축 늘어졌다. 귀두부분도 쭈글거린다. 허리는 앞의 남자보다 더 굽었다. 얼굴도 이미 피로가 역력하다. 얼마나 좆이 무겁고 힘들었으면 둘러멨으랴.

그러나 맨 뒤의 남자를 보면 아예 비참해진다. 다리는 힘이 없어 후들거리고 몸집도 가장 왜소하다. 걸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는 가야겠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좆은 이미 좆도 아니다. 파김치처럼 후줄근하다. 귀두도 이미 구별이 없고 물컹거리고 맥이 없어 한 손으로도 들 만큼 초라해진 좆이다. 그래도 좆은 좆이기에 땅에 질질 끌고 다닐 수 없다. 들어야 한다. 그리고 걸어가야 한다. 네덜란드의 Elsje가 그린 이 파스텔화는 현대의 남성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얼마나 현대의 남성을 잘 표현했는지 눈물이 날 정도이다.


여성들은 20세기 중반부터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여성해방운동을 벌였고 여성들이 바라는 만큼은 아니지만 시간을 두고 상당히 문제에 접근을 하고 해결방법을 찾고 여성 스스로도 노력을 하여 권익이 차츰 신장되고 있다. 지금도 여성들은 그들이 차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한데 뭉쳐 개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남성들은 어떠한가. 여성이 차별 받는 만큼 남성들은 우대를 받고 있는가. 그런 것은 옛날의 일이다. 자본주의라는 어쩔 수 없는 틀에 갇혀 남성들도 예속을 받으며 싸우고 있다. 남성은 남자다워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상에 눌려 문제도 제기하지 못하고 여성의 단합과 해방운동을 부러워하고 있다.
 
남성은 강해야 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어야 하고 감정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 말할 수도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의 역할은 언제 어디서나 사회적으로 주어진 남성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도 군소리 없이 해내야 한다. 남성은 수정이 되는 순간부터 어머니 모태 속에서 그 많은 여성호르몬을 이기고 남성호르몬을 분비하여 스스로 남성을 살려야 남성으로 태어난다. 자라면서 이십여 년을 어머니라는 여성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남성을 세워야 남성으로 살아남는다.
 
남성이어야 한다는 그 강박관념은 대다수의 남성들에게 죽음을 불사하는 하루하루를 살게 하면서도 조명 한 번 받지 못하고 평범한 서민으로 안으로만 병들게 한다. 남성문제는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부당하게 기대되고 강요받는 문제이다.
 
남성중심의 남성우월주의 사고는 성문화에 있어서도 성기중심의 사고를 갖는다. 실제로 여성들은 남성을 성기위주로 생각하지 않는데 남성 스스로가 성기 크기 때문에 심각한 착각에 젖어 있다. 남성은 커다란 좆을 가져야 하고 오줌발이 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좆이 큰 사람은 자신만만하고 자신의 성기가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갖는다.
 
성관계에 있어서도 남성이 주체가 되어 여성을 기절할 정도로 만들어 주어야 남성의 역할을 다했다고 믿는다. 상당히 많은 남성들이 실제로는 작지 않는데 자신의 좆이 작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성을 성기와 연결시켜 성교만이 성의 전부라고 믿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 남성다움의 본질을 성기와 성교중심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남성들은 남성은 일방적으로 여성에게 베푸는 사람이라는 왜곡된 심리를 갖게 된다. 남성들은 하룻밤에 몇 번을 해도 끄떡없는 정력을 꿈꾸며 정력에 좋다면 벌레라도 잡아먹는다. 남성은 늘 강하고 여성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교에 있어서 실제로 남성들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지만 그 속은 늘 불안하다. 하나는 심리적으로 사정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죽음과 같은 침몰이고 또 하나는 여성의 성거부이다. 사정을 하고 난 모든 수컷은 죽음을 꿈꾼다는 유명한 말처럼 사정의 오르가즘이 너무 강하기에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도 없으면서 실제로 사정을 한 뒤에는 여성의 질이라는 블랙홀에 소용돌이치며 빠져 죽어 가는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심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남성은 여성(심리적으로는 어머니)과 성교를 하면서 정복욕과 함께 소멸에의 동경을 은밀히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죽음에의 본능이다. 교미를 한 모든 수컷을 죽음을 꿈꾼다. 갓난아이 때 소년을 돌보는 것은 어머니이므로 최초의 본능적 행동을 금지하는 것도 어머니이다. 남성은 어머니의 이 금지에 의해 일어난 분노 때문에 가학적 충동을 느끼고 복수를 꿈꾸다가 죄책감과 불안의 찌꺼기로 남는다. 소년은 자신의 성기가 어머니에 비해 너무나 작기 때문에 공포와 함께 자존심을 상한다. 또 자신의 성기가 아버지에 비해 너무 작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갖는다. 남성들은 여성과 성을 나누는 것을 꿈꾸면서 동시에 사정 뒤의 죽음을 늘 두려워한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여성의 성교거부이다. 옛날에는 여성이 성교를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성은 오르가즘이 없다라는 것이 세계의 정설이었다. 당연히 여성은 남성의 성교요구에 응했고 여성자신의 오르가즘은 그저 남성의 배려로 얻어지는 덤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여성의 경제진출이 늘어나고 대중매체를 통하여 여성이 자각을 하고 정치권의 힘을 입어 여성의 권익이 늘어나면서부터 여성이 스스로 성교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여성이 성교를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다. 아내가 성교를 거부할 수 있다는 판례가 나오면서 아내가 거부했는데도 남편이 강제로 성교를 하면 강간죄가 성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법률적인 문제가 될 정도이다. 아내나 애인이 성교를 거부할 때 남성의 반응은 여성들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감정과는 완전 딴판으로 다르게 나타난다. 성은 감정이 예민하기 때문에 단지 성교를 하기 조금 부적합한 환경이라 성교를 거부했다 하더라도 남성은 여성의 성교거부를 사랑의 부존재나 사랑의 거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내나 애인으로부터 성교를 거부당한 남자들은 아주 심각한 상황에 빠지고 그 사랑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하게 된다. 여성은 단지 그 남자나 남편에 대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성교상황이 아닌 것뿐이어서 단지 성교만을 거부한 것이지만 남성들은 성교거부를 사랑의 거부 감정의 변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좆을 어떻게 생각하는냐를 잘 표현한 시가 한편 있어서 소개한다.
 

ㅈ --좆에 대하여
 
바지 안에 가지만한 자지
어릴 땐 고 놈 덕분에 한세월 좋았지만
이제는 고 놈 때문에 한세월 서럽다
 
여자야 여성으로 만들어져 간다고 아우성이지만
남성으로 태어나서 남성으로만 자라난
불쌍한 남자들은 할 말도 없다
그 놈의 좆이 무언지
 
대가리 쳐박고 싸워 덤벼 겨우 생겨서
그 엄청난 저항 속에서 용케 버티고 태어나
금지옥엽 장군감으로 키워지다가
장군이 되려고 하니 거세하자고 덤빈다
그 놈의 좆이 무언지
 
요거 자르고 조거 자르고
이건 안 되고 저건 나쁜 짓이고
반들반들 수염 깎여 예쁘게 되었다
드세면 19세기 유물이고 나약하면 마마보이다
그렇게 키워 놓고 남자더러 어떻게 하라구
 
바지 안의 가지만한 자지
그 하나 희미한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불쌍한 남자들 오늘도 도리 없이
거울 보며 새 예절을 연습한다
그 놈의 좆이 무언지

 

가장 두려운 상황은 여성이 성교를 무기화하여 서양고전에서 나오는 섹스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름 하나로 온 세계 여성이 단체를 만들고 뭉치고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여성이 성교거부로 단결된 목소리를 가지고 나올 때 과연 남성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컴퓨터와 의학이 발달되면서 사이버섹스가 가능해지고 있고 곧 머지 않아 취향에 맞는 여성을 자판기에서 골라 간단한 대화를 나누면서 성욕을 풀 날이 멀지 않았으나 그런 시대가 온다는 것은 이미 이 지구문명의 종말이 아닐까 한다. 몇십 년 사이에 남성들은 따라가기 힘든 큰 변화에 휩쓸리고 있다. 그 놈의 좆이, 자랑스럽던 좆이 이제는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아이엠에프를 겪으면서 우리는 잘 보아왔다.
 
여성들은 하다못해 식당에 나가서 써빙이라도 해서 돈을 버는데 남성들은 정말로 돈 벌 곳이 없었다. 정말로 좆이 좆 되는 세상이다. 어느 누가 이제 좆을 좆이라 하겠는가. 좆은 좆도 아니다. 좆이 좆 아닐 때 남성은 그 남성상을 잃고, 남성이 남성을 잃을 때 과연 우리의 문화나 문명이 어디로 굴러갈 것인가.
 

정력에 관하여
 
새벽 거시기 안 서는 놈에게는
돈도 꾸어주지 말란 속담이 있듯이
자고로 남자의 모든 왕성한 힘은
욕망의 근원인 정력에 있다고
남자들은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서른 다섯만 넘어 봐라
그거? 좆도 아니다
초등학교 변소 담을 넘던 오줌줄기는
한 자도 못 나가고 줄줄줄
한 컵 오줌을 누는데 한 시간을 잴잴잴
털어도 털어도 한없이 뚝뚝뚝
근데 거 희한한 일은
육체의 힘이 사그라질수록
마음은 오기가 나서
양기가 주둥이와 머리 속으로만 치솟는다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먹어봐도
한 번 주눅들은 마음은 살아날 길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깨나 쓸 때
정력을 저축할걸 그랬나
정력보험은 없나
비아그라? 팔만 아프지 그거 소용없다
이젠 쓸 데가 없어졌다
이래저래 정력의 피해자는 여자가 아닌
불쌍한 늙은 남자이다

 

성을 소제로 하는 범죄와 법률을 보더라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강간죄나 간통죄가 주중을 이루었다. 지금은 그 죄나 법도 업그레이드를 해서 아주 이상하게 늘어났다. 성희롱죄 - 엉겹결에 만들어진 이 법의 타당성을 따지는 게 아니다. 여성이 예쁘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는데 아무런 남성들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휘파람을 부는 등 희롱을 받지 않으면 그 여성은 집에 가서 거울을 보면서 울었다는 우리 형님 누이들의 몇십 년전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여성단체들의 입김에 의해서 졸속으로 만들어진 법이 또 남성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있다. 우리 남성들이 과거에 비해 더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흉악해지고 파렴치한이 되었던가. 새로운 시대상황에 맞는 교육은 팽개치고 남자들은 새로운 환경에 무조건 적을을 해야 한다. 성교육은 엉망이면서 법률은 참 훌륭하다. 남녀의 성의 차이에서 오는 인식이나 행동의 차이는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여성을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지고 있다. 성차별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물론 성이 다르다고 해서 치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의 차이에서 오는 차이점은 접어둔 채 차별이라는 굴레로 남성들을 단죄한다면 이 또한 큰 문제이다. 여성들의 행동이나 행위는 여성이기 때문에 보호받고 남성들은 남성이기 때문에 억압을 받아야 한다면 이것 또한 새로운 성차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인 여러 가지 요인들이 남성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이제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여성들 스스로는 남아를 낳지 못하면 안 된다고 태아의 성감별을 하려고 하고 아들과 딸을 차별하여 양육하고 가르치고 있다.
 
세상은 암수의 짝짓기에 의해 잡종강세의 원칙으로 번식하고 번창하게 된다. 잡종강세가 유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은 다 아는 진리이다. 그 짝짓기에 인간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섹스의 아름다움과 즐거움, 이것은 모든 예술의 기본이고 인간활동의 원동력이다.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남성은 여성에게 자신의 성적 존재를 항상 증명해야 한다. 남성은 발기되어야 성교를 할 수 있고 항상 여성의 성기를 향해 돌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늘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doing의 의미여야 하지만 여성은 발기될 필요도 없고 불감증이어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being 의 의미이다. 이 doing과 being의 의미 차이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정체성에 대단히 많은 차이가 발생한다. 남자는 흥분이 되어야 삽입이 가능해진다. 흥분은 남성의 섹스에 필수불가결의 문제이다. 좆은 빳빳하게 섰을 때 그 좆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빳빳한 좆은 인간의 번영의 필수이고 남성의 자랑이고 아름다움이다. 다만 그 좆을 합법적이고 타당한 곳에 써야 한다는 것 또한 엄연한 진리이다. 빳빳한 좆 - 그 <좆이 좆되고 좆도 아닌 것이 되는 현실>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항변이다. 저 앞의 그림 속의 세 남자들.
 
이 그림은 온세상 남성들이 직면한 <위기의 좆>을 목놓아 부르짖는 것이다. 어디 내어놓기 부끄러운 포르노 같은 그림일지라도 오늘날 너무도 풍자적인 명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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